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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텅 비어 있는 덕 통장
작성자
박정자
등록일
2008-06-11
조회수
869
내용
대학 선후배와 동기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들 바쁘게 지내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다.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데 문득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 통장에는 얼마가 들어 있냐?˝
난데없이 웬 통장 얘기냐고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내 은행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했다. 혹시나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배는 빙그레 웃으면서 ˝은행통장 말고 덕 통장 말야, 덕 통장.˝ 하는 것이었다.
˝어허, 이 사람들! 은행에 돈 쌓이는 것만 관심이 있지 덕 쌓는 것은 도통 무관심이군.
사람이 어찌 돈과 밥으로만 살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덕을 쌓고 복을 지어야 사람답게 사는 길이 되리라.
은행통장이야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하는 것을.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통장을 빨리 만들어 두시라 이 말씀이야.˝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신파조의 말투 때문에 좌중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날 모임 이후 며칠 동안 내내 ′덕 통장′이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러는 좋은 마음으로 베풀고 뭔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해도
어찌 보면 그건 진정으로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기 보다는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지 싶었다.
어느날 아침 서울로 출장 가는 남편을 역까지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진입로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가 있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운전에 썩 능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니, 미쳤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저렇게 속력을 내면 어쩌자는 거야? 아침부터!˝
그전 같으면 이렇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니면 무서운 눈으로 상대 운전자를 노려보았겠지.
하지만 그날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숨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덕 통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 저 사람이 아침부터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다′
그 아침에 마음을 그렇게 돌이켜 세운 것을 나는 두고두고 잘 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잘잘못을 떠나서 아침부터 큰소리 내고 얼굴 붉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평소에 그냥 막연하게 ′남에게 잘해야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지′하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막상 일상생활에서는 남과 부딪히는 순간순간 내 생각, 내 이익이 먼저 앞서게 되고
자연히 너그러운 마음을 내기가 불가능했다.
항상 지나고 나서 후회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이런 작은 것들보다 뭔가 큰 일을 하고 거창한 희생이라도 해야 남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범한 일상에서 얼마든지 덕을 쌓을 기회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언제 다시 그 선배를 만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선배님, 저 덕 통장에 넣으려고 날마다 동전 줍고 다닙니다.˝
- <며느리 도 통하기> 중에서, 차혜숙 님
<안젤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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